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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E……」

글쎄.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스티브는 빨개진 얼굴로 무릎을 모았다. 덕분에 닫힌 무릎 사이를 보며 토니가 아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아무렴 지금 이 시점이 그런 걸 신경 쓸 때는 아닌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여기서 정신 차리지 않으면 남은 옷마저도 다 뺏길 참이었다. 

 

정말, 다시 생각해봐도 도통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다른 것도 아니고 끝말잇기에 옷가지를 훌러덩 빼앗기다니. 뭔가 이상한 비유지만, 그야말로 눈뜨고 코 베인 기분이었다. 스티브는 아연한 눈초리로 어느 덧 반쯤 벗고 있는 제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남은 것이라고 해봐야 고작 얇은 천 두 장―속옷과 셔츠 뿐. 

 

그리고 지금. 그 셔츠마저도 언제 벗겨질지 모르는 판이다. 토니는 언제 아쉬워했냐는 듯 얄밉게 웃으며 스티브의 어깨를 은근히 매만졌다.

 

「이제 진짜 서두르지 않으면 늦는다고? Honey. 카운트다운 할 때야.」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시작된 카운트다운은 느린 듯 빠르게 진행되었다. 5. 4. 3. 2…… 초가 줄어들수록 토니의 눈이 심하게 반짝거렸다. 반대로 스티브의 입술은 꾹 다물렸다. Effect, Enemy, Ethic, Equality…… 단어 몇 개가 머릿속에서 뱅글뱅글 맴돌았지만 스티브의 표정은 풀어질 줄 몰랐다. 이미 사용한 것들만 떠오르는 바에야, 쓸모가 없기 때문이었다.

 

「―――땡. 제로야, 스티브. 벗어.」

 

그 사이, 남은 기회도 효력을 다해버렸다. 참으로 허무하게 지나가버린 카운트다운이었다. 스티브는 울며 겨자 먹기로 셔츠를 벗었다. 저도 모르게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렇다고 차마 속옷을 벗어던질 수는 없었다. 

 

토니가 하얗게 드러난 상체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그럼 E부터 다시 하지.」 했다. 카운트다운을 하기도 전에 <Eye>가 나왔다. 스티브는 억울한 표정으로 뒤늦게 생각난 <Easel>을 댔다. 그랬더니 별안간 토니가 눈매를 접으며 빙긋 웃었다. 마치 기다리던 게 왔다는 것처럼. 

그는 스티브의 달아오른 이마와 관자놀이에 입 맞추며 말했다. 정확히는, 속삭였다. 아주, 작게. 아주……, 깊게.

 

「Love」

 

사랑. L-O-V-E. 어느새 이마를 맞대고 눈매를 휜 토니가 한 번 더 속삭였다. E, again. right? 입술이 닿을 것 같았다. 너무 가까워서 되려 흐릿한 눈동자를 보며, 스티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Eye, Love……눈, 사랑……

 

「힌트를 줄까.」

 

토니는 스티브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그의 손바닥에 단어하나를 그려 넣었다. 검지가 묘한 텐션으로 피부를 간질였다. 스티브는 왠지, 그 짧은 단어가 완성되는 동안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단어는, 버드키스와 함께 끝이 났다. 스티브가 끝을 올려 발음했다. E…conomy……? 토니가 웃으며 흐트러진 금발을 쓸어 넘겼다. 그가 말했다.

 

「You」

 

갑자기 당신, 이라는 말에 스티브는 영문 모를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윽고 더할 나위 없이 붉게 물들이는 모습은 그 누구보다 사랑스러웠다. 토니는 스티브의 입술을 꾹 누르며 고백했다. I said, I LOVE YOU.

 

「……그래서, 대답은?」

 

스티브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끝말은, 더 이상 잇지 못했다.

 

 

@HAIL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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